한반도의 역사
1. 서론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자리하여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고대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면서도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역동적인 역사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한민족에게 수많은 도전과 시련을 안겨주었으나, 동시에 외부 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강인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역사를 역동적으로 전개하는 배경이 되었다. 본 보고서는 한반도에 인류가 처음 출현한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 국가의 형성, 중세 왕조의 발전, 근세 사회의 변화,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각 시대는 선사,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여 그 주요 특징과 역사적 변곡점을 심도 있게 분석함으로써 한반도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체계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선사 시대와 국가의 형성
2.1 절. 구석기·신석기 시대: 인류의 시작과 정착 생활
2.1.1 구석기 시대 (약 70만 년 전 ~ 기원전 8000년)
한반도에서의 인류 역사는 약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적인 충북 단양 금굴을 비롯하여,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 전국 각지에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1 이 시대의 사람들은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를 주요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주먹도끼, 찍개, 긁개 등이 대표적이다.2 특히 연천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기존에 동아시아 지역에는 주먹도끼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모비우스 학설’을 뒤집는 고고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1 주먹도끼는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부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만능 도구로, ’구석기 시대의 맥가이버칼’로 불리기도 한다.4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는 이동 생활을 하였으며, 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 또는 강가에 막집을 짓고 무리를 지어 살았다.2 후기 구석기 시대(약 4만 년 전)로 접어들면서 석기 제작 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슴베찌르개와 같이 작고 정교한 도구들이 나타났다.3 또한, 백두산이나 일본 규슈 등 특정 지역에서만 산출되는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한반도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인류의 이동 범위가 상당히 넓었거나 집단 간의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5
2.1.2 신석기 시대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1500년)
기원전 8000년경, 인류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며 생산 경제 활동을 전개하는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였다. 이른바 ’신석기 혁명’이라 불리는 이 변화는 인류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한반도에서는 조, 피, 수수와 같은 잡곡류를 경작하는 밭농사가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창, 활, 작살, 그물 등을 이용한 어로와 사냥이 중요한 식량 확보 수단이었다.8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작살 맞은 고래와 그물에 걸린 동물 등 당시의 사냥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10
신석기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도구의 발전과 토기의 사용이다.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보편화되면서 돌괭이, 돌보습, 돌낫 등 다양한 농기구가 제작되었다.8 또한, 옷이나 그물을 만드는 데 사용된 가락바퀴와 뼈바늘의 발견은 원시적 수공업의 시작을 알려준다.8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저장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발명품인 토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한반도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이다.8 이 외에도 이른 민무늬토기, 덧무늬토기 등이 지역과 시기에 따라 나타났다.8
농경의 시작은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하여, 신석기인들은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8 사회는 혈연에 바탕을 둔 씨족을 기본 단위로 하는 부족 사회였으며, 아직 계급이 발생하지 않은 평등한 공동체였다. 이 시대에는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특정 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무당과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 신앙이 발생하였다.8 조개껍데기 가면,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상,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은 당시 사람들의 예술 활동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8
이러한 선사 시대의 변화는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는 자연물을 최소한으로 가공한 생존 도구였고, 이 기술 수준에 머물러 있던 사회는 소규모 무리 단위의 이동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2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돌을 정교하게 가는 간석기 제작 기술이 등장하면서 농경이라는 새로운 생산 방식이 가능해졌다.8 농경은 잉여 생산물의 가능성을 열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정착 생활(움집)과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늘어난 식량을 저장하고 조리할 필요성은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새로운 발명품을 낳았다.8 이처럼 도구 기술의 발전(뗀석기 → 간석기)은 인류의 생활 방식(이동 → 정착)과 사회 구조(무리 사회 → 씨족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핵심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술이 사회 발전을 견인하는 인류사의 보편적 패턴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2.2 절. 청동기·철기 시대: 사회 변화와 권력의 등장
2.2.1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00년경 ~ 기원전 400년경)
기원전 1500년경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변화는 벼농사의 시작과 그에 따른 사회 구조의 변동이었다.13 벼농사는 기존의 밭농사보다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잉여 생산물을 낳았고, 이는 사유 재산 제도의 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권력자가 등장하면서 지배와 피지배 관계, 즉 계급이 발생하였다.
청동기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제작이 어렵고 원료가 귀해 주로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나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다.2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청동 방울 등은 지배자의 위세를 과시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반면, 반달돌칼, 홈자귀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농기구나 도구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사용되었다.2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이다.16
계급 사회의 등장은 무덤 양식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배층의 무덤인 고인돌은 거대한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야 했으므로, 당시 지배자의 강력한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6 부여 송국리 유적처럼 방어 시설을 갖춘 대규모 마을의 등장은 이 시기 사회가 점차 조직화되고 집단 간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4
2.2.2 철기 시대 (기원전 400년경 이후)
기원전 400년경부터는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철은 청동기보다 단단하고 원료를 구하기 쉬워 농기구와 무기 제작에 널리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고, 철제 무기의 사용은 정복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을 촉진하여 한반도에 여러 국가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자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 중국 화폐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어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증명한다.2
청동기와 철기의 등장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 청동은 희소성 때문에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어 주로 무기나 제기로 사용됨으로써 권력을 상징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11 이는 대중의 생산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보다는 계급 분화를 심화시키는 ’권력의 기술’이었다. 반면, 철은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재료였기에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대시켰고, 철제 무기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정복 전쟁을 촉진하며 더 큰 정치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즉, 청동기가 ’권력의 상징화’를 통해 사회적 위계를 공고히 했다면, 철기는 ’생산력과 군사력의 실질적 강화’를 통해 국가 형성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기술의 본질적 특성(희소성 대 보편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났다.
2.3 절. 고조선과 여러 나라의 성장
2.3.1 고조선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
한반도 최초의 국가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고조선이다.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신화를 통해 전해진다.17 이 신화는 하늘의 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땅으로 내려와 곰이 변한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는 하늘을 숭배하는 이주 세력(환웅 부족)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토착 세력(웅녀 부족)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8 또한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렸다는 내용은 고조선이 농경 사회였음을, 제사장인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인 ’왕검’을 합친 ’단군왕검’이라는 칭호는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시사한다.17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은 고조선의 건국 이념으로,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중요한 가치로 이어지고 있다.17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4세기경에는 왕호를 사용하고 부왕, 준왕과 같이 왕위를 세습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8조법을 시행했는데, 이는 생명과 노동력, 사유 재산을 중시하는 사회였음을 보여준다.21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이 집권한 이후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으나, 팽창 과정에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하게 되었고, 약 1년간의 전쟁 끝에 기원전 108년 멸망하였다.
2.3.2 여러 나라의 성장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서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나라가 성장하였다. 이들 국가는 각기 다른 지리적 환경과 문화적 전통 속에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발전시켰다.
Table 1: 초기 국가의 특징 비교
| 구분 (Category) | 부여 (Buyeo) | 옥저 (Okjeo) | 동예 (Dongye) | 삼한 (Samhan) |
|---|---|---|---|---|
| 위치 (Location) | 만주 쑹화강 유역 평야 22 | 함경도 동해안 23 | 강원도 북부 동해안 23 | 한강 이남 23 |
| 정치 (Politics) | 5부족 연맹 왕국 (왕, 사출도) 22 | 왕 없음 (읍군, 삼로) 24 | 왕 없음 (읍군, 삼로) 24 | 연맹체 (신지, 읍차), 제정 분리 (천군, 소도) 22 |
| 경제 (Economy) | 농경, 목축 (말, 주옥, 모피) 22 | 해산물 풍부, 토지 비옥 (고구려에 공납) 22 | 방직 기술 발달 (단궁, 과하마, 반어피) 22 | 벼농사 발달, 철 생산 (변한) 22 |
| 사회/풍습 (Society/Customs) | 순장, 1책 12법, 영고(12월) 22 | 민며느리제, 가족공동묘(골장제) 22 | 족외혼, 책화, 무천(10월) 22 | 두레, 계절제(5월, 10월) 22 |
이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각 국가들은 지리적 환경에 따라 상이한 경제 기반과 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평야 지대의 부여는 농경과 목축을 바탕으로 왕이 존재하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한 반면 22, 동해안의 옥저와 동예는 풍부한 해산물을 기반으로 했으나 고구려의 압박 속에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군장 국가 단계에 머물렀다.23 한강 이남의 삼한은 벼농사와 철 생산을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특히 정치적 지배자와 종교적 제사장이 분리된 제정 분리 사회의 특징을 보였다.23 이러한 초기 국가들의 다양한 발전 양상은 이후 삼국 시대의 전개 과정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3.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
3.1 절. 삼국의 성립과 발전: 중앙 집권 국가의 완성
고조선 멸망 이후 등장했던 여러 나라는 점차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통합되었다. 부여 계통의 유이민 세력은 압록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고구려를,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28 신라는 경주 지역의 6개 부족이 연합하여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다.30 이들 국가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삼국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발전 경로를 보였다. 출발점과 지리적 환경은 달랐지만, 강력한 고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과제는 공통적이었기 때문이다. 각국은 율령 반포, 관등제 정비, 불교 공인을 통해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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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 때부터 5부족 연맹체의 성격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4세기 소수림왕 대에 이르러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며,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완비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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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3세기 고이왕 때 16관등제와 관복제를 마련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한강 유역의 맹주로 떠올랐으며, 4세기 근초고왕 때 마한 전역을 복속하고 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는 등 최전성기를 맞이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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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했으나, 4세기 내물 마립간 때 김씨에 의한 독점적 왕위 세습이 확립되었고, 6세기 법흥왕 대에 율령 반포, 병부 설치, 불교 공인,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 사용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32
삼국의 통치 조직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 체계와 귀족 회의로 구성되었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상좌평, 신라의 상대등은 각국의 최고 관직이었으며, 제가회의(고구려), 정사암 회의(백제), 화백 회의(신라)와 같은 귀족 회의 기구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며 왕권을 견제하고 보좌했다.31
이러한 삼국의 발전 과정은 고대 국가 형성의 보편적 모델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각기 다른 배경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 확장, 왕위 세습제 확립, 율령 반포, 관료제 정비, 불교 공인이라는 공통된 단계를 거쳤다.32 이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 과제들이었으며, 당시 선진 문물이었던 중국의 제도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수렴 진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불교는 기존의 다양한 토착 신앙을 통합하고 왕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통해 왕권을 신성한 권위로 뒷받침하는 고등 종교로서, 세 나라 모두에서 왕권 강화와 사상 통일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40
3.2 절. 가야 연맹: 철의 왕국과 그 한계
삼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의 변한 지역에서는 여러 소국이 연맹체를 이룬 가야가 존재했다.43 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과 해상 교역을 통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낙동강 하류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중국의 군현 및 왜와 교역하며 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44
그러나 5세기 초,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기 위해 남하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에 의해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연맹의 중심지는 내륙의 고령 대가야로 이동했다.45 대가야는 5세기 후반 후기 가야 연맹을 주도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가야는 끝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가야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내부적으로는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하여 연맹체 전체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했다.48 이는 금관가야가 주변 8개국의 공격을 받아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던 ’포상팔국의 난’에서도 드러난다.50 외부적으로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하여 끊임없는 압박과 견제를 받아야 했다.48 결국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 법흥왕에게, 562년 대가야가 신라 진흥왕에게 차례로 병합되면서 500여 년의 역사를 마감했다.45
가야의 역사는 경제력만으로는 국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이다. 가야는 뛰어난 제철 기술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과 군사 기술을 보유했다.44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개별 소국들의 이해관계가 우선시되는 느슨한 연맹체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고구려의 단 한 번의 공격에 전기 연맹이 와해되는 등 외부 위협에 통일된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구조적 취약점을 드러냈다.46 반면, 신라와 백제는 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32 결국 가야의 멸망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의 구축이 고대 국가의 생존과 패권 장악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증명한다.
3.3 절. 삼국의 사회와 문화: 불교 수용과 고유 문화의 융성
삼국 시대의 사회는 왕과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였다. 특히 신라는 혈통에 따라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신분 제도를 운영했다.51 골품제는 개인의 정치적 진출 범위는 물론, 집의 크기나 옷의 색깔 등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강력한 사회 규범이었다.37
4세기 후반부터 삼국은 선진 문물 수용과 국가 통합을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40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는 데 기여했으며, 삼국의 학문과 예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0 신라의 황룡사, 백제의 미륵사와 같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 대규모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는 불교가 호국 신앙의 성격을 띠었음을 보여준다.53
삼국의 문화는 각기 독창적이면서도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고분 문화는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과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는 웅장한 돌무지무덤과 함께 무용총, 강서대묘 벽화처럼 생동감 넘치는 고분 벽화를 남겼다.51 백제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을 통해 세련되고 국제적인 문화를 과시했다.51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했는데, 금관총,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관과 천마도 등은 신라의 독특한 문화를 상징한다.53
이 외에도 백제 금동대향로, 고구려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신라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은 삼국 시대의 뛰어난 공예 기술과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53 삼국은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고대 일본의 아스카 문화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51
3.4 절. 신라의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7세기 동아시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중국의 수·당 제국이 얽힌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 있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거센 압박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나당 동맹)을 체결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37 나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마저 멸망시켰다.55
그러나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55 이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당의 세력을 대동강 이남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676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55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과 고구려의 광활한 북방 영토를 상실하고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된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통일로서, 이후 단일한 민족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55
한편, 고구려 멸망 후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부흥 운동이 계속되었다.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말갈족을 규합하여 698년 만주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했다.59 발해는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스스로를 ’고려국왕(고구려왕)’이라 칭하는 등 고구려 계승 의식을 명확히 밝혔으며 60,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주변국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의미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60
이로써 7세기 말부터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는 남쪽의 통일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전개되었다.62 두 나라는 때로 대립하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동해안을 따라 개설된 ’신라도(新羅道)’를 통해 사신을 교환하고 무역을 하는 등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62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단선적인 성공이나 실패로 규정하기 어렵다. 신라의 통일은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민족 문화적 통합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고구려의 북방 영토 상실과 발해의 건국이라는 민족의 분열적 상황을 낳았다. 이처럼 남부의 통합과 북부의 분리가 동시에 이루어진 복합적인 결과는 이후 한민족의 영토 의식과 역사 인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이러한 역사적 복합성을 인정하고, 신라 중심의 단일 국가 서사를 넘어 한민족의 역사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려는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4. 고려 시대: 새로운 통일과 사회 변화
4.1 절. 고려의 건국과 민족의 재통일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부터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과 지방에 대한 통제력 약화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중앙 정부의 수탈이 심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견훤이 후백제를,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한반도는 다시 후삼국 시대로 분열되었다.
후고구려의 장군이었던 왕건은 송악(개성)의 유력한 호족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과 덕망으로 신망을 얻고 있었다.66 폭정으로 인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추대된 그는 918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66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고려는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북진 정책을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내세웠다.66
태조 왕건은 분열된 민족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 포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신라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유지했으며,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민족의 통합을 꾀했다.67 또한, 전국의 유력한 호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는 정책을 폈고(29명의 부인), 관직과 토지를 하사하며(역분전), 성씨를 내려주었다(사성 정책).68 동시에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통해 지방 호족을 견제하고 중앙의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다.68
이러한 포용 정책을 바탕으로 고려는 935년 신라 경순왕의 자발적인 항복을 받아냈고, 936년에는 내부 분열로 약화된 후백제를 격파하며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66 고려의 통일은 신라의 통일과 달리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발해 유민까지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태조는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으로 ’훈요 10조’를 남겼는데, 여기에는 불교 숭상, 북진 정책 계승, 거란 경계, 민생 안정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66
4.2 절. 고려의 통치 체제와 사회
고려 초기는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이 강했으나, 4대 광종 대에 이르러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했으며, 과거 제도를 도입하여 왕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 세력을 등용했다. 또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확립했다.
성종 대에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통치 제도를 정비했다. 중앙은 2성 6부 체제를, 지방은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66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 사회였다. 왕실과 혼인을 통해 권력을 독점한 문벌 귀족 가문들은 음서와 공음전을 통해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세습했다.70 그러나 12세기 들어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이 일어나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71 이자겸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왕위까지 넘보았으며, 묘청 등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벌 귀족에 맞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다. 이 두 사건은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드러내며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했다.72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은 결국 1170년 무신정변으로 폭발했다. 문신에 비해 차별받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74 이후 약 100년간 무신 정권이 이어졌으며, 특히 최충헌은 교정도감이라는 독자적인 권력 기구를 설치하고 4대 60년간 세습하며 강력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74 무신 집권기 동안 지배 체제가 흔들리면서 전국 각지에서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으며, 만적의 난처럼 신분 해방을 외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77
4.3 절. 대외 관계와 외세의 침략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 민족과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는 거란(요)의 침략을 세 차례나 받았다. 1차 침입 때 서희는 외교 담판을 통해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78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찔러(귀주대첩) 거란의 침략 의지를 꺾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78
13세기에는 몽골(원)의 침략을 받았다. 최씨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약 40년간 항전했으나,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결국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했다.81 그러나 무신 정권의 군사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배중손의 지휘 아래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3년간 항쟁을 이어갔다.82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준 사건이었다.81
이후 약 100년간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는 원 간섭기에 들어섰다. 왕실의 호칭과 관제가 격하되고, 정동행성이 설치되어 내정 간섭을 받았다.85 공녀와 공물 요구로 백성들의 고통이 컸으며,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여 대농장을 소유하는 등 사회 모순이 심화되었다.87
14세기 중반,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친원 세력인 기철 일파를 숙청하고, 정동행성을 폐지했으며, 몽골풍을 금지했다.88 또한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했다. 내부적으로는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개혁을 단행했다.88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과 공민왕의 시해로 중단되고 말았다.89
4.4 절. 고려의 문화
고려는 신라와 발해의 문화를 계승하고 중국 송나라 등과 활발히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다채로운 문화를 발전시켰다. 불교는 고려의 국교로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팔만대장경과 직지심체요절은 고려의 뛰어난 불교 문화와 인쇄술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제작된 방대한 불교 경전 목판으로, 그 정교함과 완벽함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92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약 78년 앞선 것이다.92
고려의 귀족 문화는 청자에서 그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표면에 무늬를 파고 다른 색의 흙을 메워 넣는 독창적인 상감 기법으로 제작된 상감청자는 비색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문양으로 고려 예술의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96
원 간섭기에는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이 안향에 의해 소개되었다.99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는 유학으로, 고려 말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신진 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101 이들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고, 이는 결국 조선 건국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5. 조선 시대: 유교 국가의 성립과 변화
5.1 절. 조선의 건국과 통치 체제 정비
고려 말, 권문세족의 횡포와 잦은 외침으로 국력은 쇠퇴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대부와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며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이 새로운 개혁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 세력은 위화도 회군(1388)을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정도전 등 급진파 신진 사대부와 손잡고 과전법을 실시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뒤, 1392년 새 왕조인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103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등을 저술하여 성리학적 민본주의와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를 설계했다.105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했고,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유교 정치를 실현하며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민족 문화의 기틀을 다졌다.
조선의 통치 체제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된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통해 확립되었다.106 『경국대전』은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6전 체제로 구성되어, 중앙과 지방의 행정 조직, 관리 임용, 조세, 교육, 군사, 법률 등 국가 운영의 모든 측면을 규정했다.108 중앙 정치는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6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언론 기능을 담당하여 왕권과 신료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105 이러한 통치 체제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를 지향했다.111
5.2 절. 사림의 성장과 붕당 정치
15세기 훈구 세력이 중앙 정치를 주도하는 동안, 지방에서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림 세력이 성장했다.113 이들은 고려에 충절을 지킨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었으며, 김종직을 거치며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114 성종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은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며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의 큰 사화(士禍)를 겪으며 큰 피해를 입었다.114
그러나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통해 지방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다.113 서원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향약은 향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며 사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사림은 16세기 후반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중앙 정계를 장악했다.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 문제와 이조전랑직 임명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朋黨) 정치가 시작되었다.116 붕당은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정치 집단으로, 초기에는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공론(公論)을 형성하며 비교적 건강하게 운영되었다.115 이후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등 이합집산을 거듭했다.115 현종 때에는 효종의 정통성을 둘러싼 예송 논쟁이 벌어지는 등 붕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기도 했다.118
5.3 절. 양난의 극복과 사회 변화
16세기 말, 200여 년간 평화를 누리던 조선은 큰 국난을 맞이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며 조선에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정명가도)고 요구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592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왔다. 이것이 임진왜란이다.120 전쟁 초반 조선은 준비 부족으로 한양까지 내주며 큰 위기에 처했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항전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120 7년간의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으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인명과 문화재를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120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조선은 북방의 위협에 직면했다. 만주에서 성장한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으나,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636년 침략해왔다(병자호란).123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굴욕(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125
두 차례의 큰 전쟁은 조선 사회에 깊은 상처와 변화를 남겼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의리를 명분으로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 운동이 효종 대에 추진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126 한편,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북학 사상이 대두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 질서가 크게 흔들렸고, 경제적으로는 농업 생산력이 감소하고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5.4 절. 조선 후기의 정치 변동과 사회 개혁
붕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영조와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정리하고, 이조전랑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할 인재를 양성하고, 수원 화성을 건설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의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128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소수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하고 국정을 좌우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다.129
세도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삼정의 문란’이었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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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田政): 토지세의 문란으로, 각종 부가세를 덧붙여 과도하게 징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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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軍政): 군포의 문란으로,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 이미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 도망간 사람의 몫을 친척이나 이웃에게 대신 걷는 ’족징’과 ‘인징’ 등의 폐단이 극심했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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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還穀): 빈민 구제 제도였던 환곡이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되어 농민을 수탈하는 수단이 되었다.132
이러한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결국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 전국적인 농민 항쟁으로 폭발했다.134
이러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학문인 실학이 등장했다. 실학자들은 공리공론에 빠진 성리학을 비판하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다.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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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학파(경세치용학파):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은 토지 제도의 개혁을 통해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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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학파(이용후생학파):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청의 발달된 기술과 상공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주장했다.138
실학은 당시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못했으나, 사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근대 지향적인 사상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136
6. 근대 사회의 전개
6.1 절.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외세의 침략
19세기 후반, 조선은 세도 정치의 폐해와 서양 열강의 접근이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강력한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도 정치의 핵심 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으며,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다. 또한 ’사창제’를 실시하여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는 쇄국 정책을 펼쳤다. 프랑스 선교사 처형을 빌미로 프랑스가 침략한 병인양요(1866)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침략한 신미양요(1871)를 격퇴한 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분명히 했다.
6.2 절. 개항과 근대화 정책의 추진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 조선의 대외 정책은 변화를 맞았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을 일으켜 무력 시위를 벌였고, 결국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했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일본에 수신사, 청에 영선사,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시찰하게 했다. 또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개화 정책은 구식 군인과 보수적인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임오군란(1882)으로 이어졌다.
개화 정책을 둘러싸고 개화파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는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과 민중의 지지 부족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6.3 절.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19세기 말, 외세의 경제적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이 심해지자 농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계기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군이 봉기했다(동학농민운동). 이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며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외세를 몰아내고자 했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에게 승리하고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다급해진 정부가 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자,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군도 조선에 상륙했다.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했다. 이후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일본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강요 아래 제1차 갑오개혁(1894)이 시작되었다.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신분제 폐지, 과부의 재가 허용,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등 근대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2차 갑오개혁을 통해 내각 제도를 도입하고 지방 제도를 개편하는 등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후 을미사변(1895)을 통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행된 을미개혁에서는 단발령, 태양력 사용 등이 시행되었으나, 이는 전국적인 의병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6.4 절. 대한제국의 성립과 국권 수호 운동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1896).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독립협회는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 자강 개혁을 주장하며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독립협회의 활동과 높아진 자주독립 여론에 힘입어 고종은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했다.140 대한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광무개혁을 추진했다.140 황제권을 강화한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고,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지계를 발급했으며, 상공업 진흥과 근대적 교육 기관 설립, 군비 증강 등을 꾀했다.140
그러나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의 본격적인 국권 침탈로 좌절되었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1905)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당했다. 이후 일본은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을 통해 군대를 해산시켰고,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국권 피탈에 맞서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통해 을사늑약을 규탄했고,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으며, 해산된 군인들이 합류한 정미의병이 일어나는 등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7. 현대 사회의 발전
7.1 절. 일제 강점기와 민족의 수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이어진 일제 강점기는 한민족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 통치를 자행했으며, 통치 방식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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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무단 통치):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해 한국인의 모든 자유를 억압했다.143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교사들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한다는 명분 아래 많은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지주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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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문화 통치):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운동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전환했다.144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고, 일부 언론(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용하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을 이간질하고 친일 세력을 양성하려는 ’민족 분열 통치’에 불과했으며, 실제로는 경찰 인력과 장비를 증강하고 치안 유지법(1925)을 제정하여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들을 더욱 교묘하게 탄압했다.144 경제적으로는 산미 증식 계획을 통해 쌀 생산량을 늘려 일본으로 수탈해 가면서, 한국 내 식량 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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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통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민족 말살 통치를 자행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워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고, 신사 참배와 황국 신민 서사 암송을 강요했으며,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행했다. 또한,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인력과 물자를 무자비하게 수탈했으며, 수많은 청년을 징병과 징용으로 전쟁터와 공장으로 끌고 갔고,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하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7.2 절. 독립을 위한 투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시작된 비폭력 만세 시위는 전국적으로, 그리고 해외 동포 사회로까지 확산되었다.146 3·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전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을 체계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끌 구심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147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 왕정이 아닌 ‘민주공화제’ 국가임을 헌법인 임시 헌장을 통해 천명했으며,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 공화정이었다.146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국내와 연락하며 독립 자금을 모으고,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 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149
1930년대 이후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했으며, 이는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147 1940년에는 충칭에 정착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 선전 포고를 하며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147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법통은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계승되고 있다.146
7.3 절. 광복과 분단, 그리고 6·25 전쟁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의 승리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한국은 마침내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잠시, 한반도는 연합국, 특히 미국과 소련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새로운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면서 국토는 분단되었다.150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심화되면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결렬되었고,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152 유엔은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결의했으나, 소련과 북한의 거부로 선거는 남한 지역에서만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 9월 9일에는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북 분단은 고착화되었다.151
이념 대립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적으로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던 국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는 등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3년여의 전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152
6·25 전쟁은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낳았으며, 국토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 깊은 적대감과 불신을 남겼고,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한 분단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7.4 절. 대한민국의 발전: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
전쟁의 폐허 속에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현대사를 개척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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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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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승만 정부는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는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붕괴되었다.153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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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주주의의 발전은 순탄치 않았다.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이후 18년간 장기 집권했다. 유신 헌법을 통해 영구 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은 부마 민주 항쟁 등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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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하고, 이에 항거한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비극이 발생했다.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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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민주 항쟁인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153 국민들의 거센 요구에 굴복한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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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 (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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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통해 경공업부터 중화학 공업에 이르기까지 산업 구조를 고도화했다.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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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높은 교육열, 그리고 정부의 강력한 정책 추진에 힘입어 한국 경제는 세계가 놀랄 만한 고속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다.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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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반도체, 자동차, 선박, 전자 제품 등 첨단 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으며, 2011년에는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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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급속한 성장의 이면에는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 빈부 격차 심화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겼다.157
7.5 절. 북한의 변화와 남북 관계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주체사상을 유일한 통치 이념으로 삼아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했다.158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를 내세우며 폐쇄적인 체제를 유지했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158 1990년대 이후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겪었으며,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여 국제 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다.
분단 이후 남북 관계는 대립과 화해를 반복해왔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시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으며, 2000년과 2007년, 2018년에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평화와 협력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의 핵 개발 문제 등으로 남북 관계는 여전히 긴장과 불안정 속에 놓여 있으며,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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